감상평: 스끼다시만 있더라
빌드업 과정만 보여줌
올초부터 호퍼의 전시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에 달력에 체크해 두고 기대하며 기다렸다. 예약이 오픈되었을 때 보니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서 티켓팅해야 한다고 해 당황스러웠다. 나는 보통 전시장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전시 초기에는 되도록 가지 않는 편이지만 나중에 관람하려면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오픈 첫 주 토요일에 관람하게 되었다.
관람객이 많긴 했지만 나름의 대기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스텝분들도 모두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큰 혼란은 없었다. 호퍼의 그림이 아닌 전시장의 빈벽을 보며 사람들 틈에 서있는 시간은 괴롭긴 했지만, 2층에 입장할 때 제공되는 40페이지짜리 책자에 전시 내용이 잘 담겨있는 것은 좋았다.
2층-3층-1층 순서로 보라고 안내해 주시는데, 1층부터 봐도 무방 할듯하다. 예매한 입장시간에 맞춰 줄지어 들어가게 되면, 2층 입구에 줄이 길고 전시장 내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봐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1층 먼저 둘러보고 2층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안내받은데로 2층-3층-1층 순서로 보았는데, 2, 3층에서는 호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빛과 그림자를 연구했는지 빌드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습작, 에칭, 수채화 위주의 작품이 주를 이뤘다. 유화도 몇 점 있긴 했지만, 바다의 모습이 담긴 수채화 작품 앞에서 나는 흥미를 완전히 잃고 대충 보았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열심히 즐겁게 관람하고 1층에 메인 작품이 있겠거니 기대하며 내려갔다가 실망했다.
1층의 입구 쪽에 <햇빛 속의 여인> 작품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호퍼 부부의 이야기와 삽화들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전시가 국내에서 진행되면 대표작이 몇 점 안 되는 것은 흔하지만 이렇게까지 스끼다시만 차려놓은 전시는 처음 봤다. 물론 벽에 드리워진 햇빛을 볼 수 있는 몇 개의 작품이 있긴 했지만, 미리 알았다면 그걸 보기 위해 서울까지 가서 땡볕아래 줄을 서진 않았을 것이다.
1층에 재생되고 있던 영상은 1시간 34분짜리인데 앉을자리가 없어 잠깐만 보다가 나왔다.
나는 내가 호퍼를 좋아하는 줄 알았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빈방에 빛과 그림자 그림이지 호퍼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시립미술관 2층 도서자료실 입구 쪽에 호퍼의 아트북이 진열되어 있으니 열려있다면 들러 보고 가면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시보다 아트북을 천천히 본 것이 더 좋았다.
기대 없이 간다면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처럼 호퍼의 특정 작품을 보고 싶다는 기대 속에 간다면 실망할 확률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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